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문단 편집) == 생애 == [[1904년]] [[3월 7일]] 독일 동부의 [[할레]]안데어잘레(Halle an der Saale)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작곡가이자 테너인 리하르트 브루노 하이드리히(Richard Bruno Heydrich, 1865~1938)였는데, 유대인 혈통의 유명 지휘자 [[브루노 발터]]의 회고에 따르면 가창 면에서나 연기 면에서나 나쁘지는 않았지만 썩 두드러지지도 않았던 2류 성악가였다고 한다.[* 덤으로 발터는 성품에 모난 데가 없었던 이 인물에게서 어떻게 라인하르트 같은 악마가 나올 수 있었는지 의아해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엘리자베트 아나 마리아 아말리아 크란츠(Elisabeth Anna Maria Amalia Krantz, 1871~1946)로, [[작센]] 왕국의 [[드레스덴]] 궁정의 궁정 고문관을 맡은 음악 연구자 게오르크 오이겐 크란츠(Georg Eugen Krantz, 1844~1898)의 딸이었다. 라인하르트라는 이름은 그의 아버지가 [[1895년]]에 지은 [[오페라]] 아멘(Amen)의 주인공의 이름에서 따왔으며, 트리스탄 오이겐이라는 미들네임은 [[아서 왕 전설]]과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트리스탄]]과 외조부인 게오르크 오이겐 크란츠 교수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하이드리히는 어려서부터 병약하여 수영, 펜싱, 승마 등 엄청 다양한 운동을 했다고 하며 귀족은 아니더라도 아버지가 꽤 잘나가는 음악가이며 어머니 또한 집안이 괜찮아서 유복한 생활을 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따라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감상을 자주 했다고 하며 이 바그너의 음악이 그가 히틀러를 따르게 된 이유라고도 한다.[* 참고로 히틀러는 [[바그네리안|바그너의 팬]]이었단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바그너는 먼 훗날에도 [[바그너 그룹]]의 어원이 되면서 또다시 [[풍평피해]]를 입었다.] (Hitler's Hangman -Robert Gewarth-) 하이드리히는 학창시절 때부터 [[유대인]]이라면서 왕따를 당해왔다. 내성적인 성격과 톤이 높았던 목소리도 한 몫 했다. 해군사관학교에서의 별명은 [[모세]] [[헨델]]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유대인들과 절친했고 집으로 [[랍비]]들까지 데려와 사이좋게 이야기도 나누고 술자리를 가진 점 때문에 이런 소문은 신빙성을 얻었다고 한다. 물론 본인이나 아버지는 극구 부인했고 사업이나 여러 인맥 때문에 유대인들과 친하게 지냈다고 밝혔다.[* 사실 당시 독일 음악계에 유대인들 비중이 높았기에 음악가들이 유대인들과 친한 경우는 허다했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였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나치 찬양곡을 지휘하라는 히틀러의 요구를 묵살하자, 히틀러가 수용소로 보낸다고 협박함에도 푸르트벵글러는 거리낌없이 "그거 잘됐네요. 수용소로 가면 음악가 친구들이 많을테니 저는 반갑게 가겠습니다."라고 대꾸할 정도로 음악계에 유대인들이 많았다. 결국은 푸르트벵글러가 유대인 음악가들에 한하여 자비를 베풀어주는 조건으로 지휘를 수락했지만.] 유대계라는 소문은 하이드리히가 죽을 때까지 끈질기게 거론됐다. [[그레고어 슈트라서]]의 조사로는 유대인이 아니라고 확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인리히 힘러]]가 하이드리히를 통제하는 수단으로서 소문의 유포를 막지 않았다고 한다. Hitler's Hangman에 따르면 그의 할머니가 유대인과 재혼했다고 한다. 그는 성적이 레포름김나지움에 진학 할 정도로 우수하였고 화학분야에도 많은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음악적으로도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어머니가 사관학교에 입학하라고 권유했고 그는 작곡가가 되어 가업을 이어나가는것을 포기하고 [[1922년]]에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중위까지 된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자랑스러워 했고 아버지는 그가 음악가가 되길 포기한 것을 아쉬워했다고 한다. 그런데 [[1931년]]에 모종의 이유로 쫒겨났다. 하이드리히가 훗날 이 사건을 은폐했기 때문에 진상은 알 수 없지만, 일부에서는 약혼녀가 있음에도 다른 처녀와 내연관계를 가진 것이 발각되어 "여성의 명예와 장교의 품위를 훼손했다."는 명목으로 퇴역했다고 한다. 퇴역할 사안 까지는 아니나 처녀의 아버지가 당시 해군총사령관이던 [[에리히 레더]] [[상급대장]]과 막역한 친구였기 때문에 강제로 퇴역되었다고 한다. 레더 제독은 1928년 10월 1일 한스 젠커 해군 상급대장에 이어 총사령관에 취임했으므로 강제 예편의 발단이 되는 사건은 최소한 이 이후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하이드리히의 직속상관은 [[독일 국방군]] 정보부서인 방첩국(Abwehr, [[아프베어]])을 이끌던 [[빌헬름 카나리스]] 해군 소장이었다. 훗날 대장까지 진급한 방첩국의 국장 카나리스 제독과 [[나치당]] 소속 보안국(SD)을 이끌던 하이드리히는 정보기관 특유의 충성경쟁 때문에 라이벌이 된다. 그러나, 카나리스는 하이드리히의 음악적 재능을 마음에 들어했고 보안국과 방첩국의 관계가 라이벌 관계였지만 하이드리히가 암살당하기 직전까지도 둘은 개인적으론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나치당에 대한 충성심이 의심스럽고, 해군 [[원수(계급)|원수]] [[카를 되니츠]] 제독이 회고록에서 카나리스를 '천의 얼굴을 가진 사나이'로 묘사할 만큼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성격인 카나리스가 아돌프 히틀러 집권 후에도 계속 방첩국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은 카나리스가 위에도 언급된 하이드리히의 석연찮은 전역에 관련된 진상을 아는 몇 안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는 유대인 가계라는 것을 카나리스가 알고 있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국방군과 나치당 할 것 없이 모든 정보부서를 자기 휘하에 두고 싶어했던 하이드리히가 그래서 카나리스에게는 꼼짝 못했다고 한다. 힘러와의 암투에서 보듯이 하이드리히는 상관이라고 공손해하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이는 신빙성이 있다. 이는 또한, 강제 예편으로 해군 및 관련 인사들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음에도, 죽는 순간까지 딱히 해군 인사들을 적대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일 수도 있다. [[파일:attachment/reinhard05.jpg]] [[파일:attachment/reinhard04.jpg]] 당시 하이드리히는 리나 폰 오스텐(Lina von Osten 1911년 6월 14일~1985년 8월 14일)과 약혼한 상태였다. 이 여성은 나중에 전쟁이 끝난 뒤, <전범과의 생활>이라는 자서전을 썼다고 한다. 하급귀족 출신인 리나는 발트 해 연안의 페마른 섬 출신의 마을 학교 교장의 딸로, 엷은 황갈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하이드리히의 불명예스러운 행동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두 사람의 관계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은 듯했다. 리나의 동생 위르겐 폰 오스틴은 1928년 히틀러의 연설을 들은 뒤 히틀러에게 완전히 빠져들었고, 리나 자신도 나치당 여성단체에 가입했다. 참고로 동생 위르겐은 '우린 대체 무엇을 위해 싸웠습니까?'를 말한 주인공이라고 알려져 있는 경우가 있는데 그 말을 한 사람은 [[위르겐 기르겐존]]이다. 하이드리히에게는 나치당에서의 길이 이미 다져져 있는 셈이었지만, 처음에는 나치당의 사상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고 돌격대의 거친 이미지만 보고 그들을 판단했다. 그러다가 약혼녀 리나 폰 오스텐이 하이드리히에게 [[SS]]에 입대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이후 리나는 하이드리히와 결혼하여 실케(1939년 출생), 마르테(1942년 출생), 클라우스, 하이더(1934년 출생)를 낳았다. 사고로 일찍 죽은 클라우스(1933~1943)을 제외한 나머지 자식들은 행방이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SS는 히틀러의 친위 경호대로써 약 1만 명의 대원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1931년 27세의 하이드리히는 나치당에 가입하고 SS의 대원이 되었다. 하지만 하급병사는 봉급이 없는 자원봉사자나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하이드리히는 보다 높은 직위로 올라갈 궁리를 했는데, 이 과정에서 당시 SS의 첩보 부서를 창설할 계획을 세우고 있던 [[SS]]장관 [[하인리히 힘러]]에게 발탁되었다. 하이드리히가 힘러의 부관으로 임명된 이유는 특히 하이드리히가 장신의 금발에 탄탄한 체구를 가져서 겉으로는 금발벽안에 탄탄한 체격이라는 이상적인 게르만족의 전형으로 보인다는 점에 힘러가 완전히 매료되었기 때문이였다. 알려진 바로는 하이드리히는 어릴적 친구인 친위대 대장 [[카를 폰 에버슈타인]](Karl von Eberstein) 남작을 통해 힘러의 측근이었던 에버슈타인은 하이드리히와 힘러의 만남을 주선했다. 나중에 들리는 설명에 따르면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첫 만남은 오해로 인해 이루어졌다. 당시 하이드리히는 통신전문가(하이드리히가 해군에 있었을 때의 직무가 통신분야였다)를 모집하는 줄 알고 지원했는데 정작 힘러는 보안전문가를 찾다가 하이드리히를 고용하게 된 것이었다. 하이드리히는 어렵게 면접 기회를 잡았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제국지도자의 착각을 바로 잡아주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독일어로 통신장교는 Nachrichtenoffizier, 정보장교는 Nachrichten'''dien'''offizier이다. 단 네 글자 차이인 것. 게다가 다른 1순위 후보가 이미 있었고 힘러는 이쪽을 더 마음에 들어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 이쪽은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가 나치를 정탐하기 위해 밀어넣은 [[프락치]]였다고 한다. 힘러는 하이드리히에게 단 20분을 주고 친위대 정보부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지 써보라고 했다. 하이드리히는 자신이 해군 정보 세미나에서 얻은 피상적인 지식과 오래전 바다에서 긴 시간을 보내면서 대부분 영국산 스릴러 [[소설]]을 읽었던 내용을 바탕으로 기억에 남는 것을 추가했고, 신빙성을 더하기 위해 적절하고 정확하다고 생각되는 군 전문 용어를 조금 포함시켰다. 그 결과 힘러는 그것을 검토한 뒤 만족스럽다고 평했다. 하이드리히는 일자리를 얻게 되었고 [[힘러]]로부터 고향 함부르크를 떠나 뮌헨으로 갈 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931년 7월 14일 하이드리히는 친위대 상병이라는 초라한 계급으로 함부르크 친위대에 합류했다. 당시 함부르크 친위대 대원 대부분은 도시의 홍등가와 비어홀에서 빌붙어 살던 젊은 사회 부적응자들로 조직되어 있었다. 10월 5일 뮌헨에서 전문이 왔는데 내용은 "당원 번호 544916번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당원은 본부의 명령에 따라 올해 10월부로 친위원수의 참모진에 합류한다."라는 내용으로 함부르크 본부를 놀라게 했다. 봉급은 190제국 마르크로 변변치 않았고 정보국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하부조직은 거의 없었다. 뮌헨 투르프켄슈트라세(Turfkenstrasse) 23번지 건물의 비좁은 4층에서 하이드리히는 비서인 아내와 조수 3명과 함께 팀을 이루어 일했다. 하이드리히는 처음부터 세 사람 몫의 능력을 하며 밤낮으로 일을 했다. 하이드리히의 업무량은 베를린에 있는 [[괴링]]의 업무량과 맞먹을 정도였다. 하이드리히는 기존의 친위대 기록에서 자료를 뽑아 독재 권력의 기반인 방대한 색인 카드를 만들었고 그 속에는 동료 친위대원들에 대한 세세한 사항들을 비롯해 정권에 미약하게나마 위협을 줄 수 있는 모든 인물들의 정보가 기록되어 있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친위대 보안국(Sicherheitsdienst, SD)으로 이어졌다. 정식명칭은 친위대(SS) 국가보안본부(Reichssicherheitshauptamt, RSHA) 제6국, 해외보안국(SD-Ausland)이었다. 제3국도 약칭이 SD였는데 이는 국내보안국(SD-Inland)이었다. 하지만 3국은 인지도가 낮아서 보안국이나 SD라 하면 보통 6국을 가리킨다. 보안국은 [[하인리히 힘러]]의 산하기관이었지만, 실제로는 하이드리히의 지휘하에 있었다 그 후 쾌속 진급해 SS[[대위]]로서 보안국의 초대 국장이 되었다. 하이드리히의 보안국은 나치가 벌인 숙청과 정치공작을 진두지휘하며 은폐공작을 벌였다. [[나치]] 당내 온건파(좌파)와 돌격대를 싸잡아 숙청한 [[장검의 밤]](Nacht der langen Messer)이나 [[폴란드]] 침공을 위한 증거조작([[통조림]]: Konserve 작전), [[수정의 밤]](Kristallnacht) 등이 대표적인 하이드리히의 작품이다. 전쟁 전 [[소련]]의 손발을 자르는 삽질이었던 [[대숙청]]도 [[독일 국방군]] 방첩부(Abwehr)와 SD의 보기 드문 공동공작으로 촉발되었다는 연구도 있으며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베르너 폰블롬베르크]] 장군의 블롬베르크-프리치 사건, 1939년 8월에 폴란드에서 일어난 글라이비츠 사건, 1939년 11월에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펜로 사건 등 국내외의 정치사건에는 대부분 하이드리히가 관여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Bf-109E3 Reinhard Heydrich.jpg|width=100%]]}}}|| ||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Bf 109 E-3 ||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1939년 9월, 하이드리히는 스스로 자신의 지배하에 있는 SD와 보안경찰을 통합해 "국가보안본부"를 세우고 수장 자리에 올랐다. 1941년 6월에는 [[독소전쟁]]에 앞서서 유대인과 공산주의자의 토벌을 위해서 살인부대인 [[아인자츠그루펜]]을 조직해서 유대인들을 대량학살했으며 [[독일 국방군]]의 [[에두아르트 바그너]]와 소련 점령지역의 유대인 학살에 대한 업무 협약을 맺기도 하였다. 독소전쟁이 터지자 자기 자신도 공군 소령의 계급을 달고 [[Bf109]] 조종사로 참전한다. 당시 [[독일국방군]]은 타군으로의 전군이 보기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하이드리히가 마침 해군에 중위 계급으로 몸담았던 이력이 있었으므로 공군으로 현역 복귀할 수 있었다. 하이드리히는 조종사로서 1941년 7월까지 소련의 대공포에 맞기 전까지 100여번의 임무를 수행하였고 2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정규군 장교 복무 경험이 있는 일반친위대 고위 장교 중 하이드리히처럼 정규군 하급 장교로 복귀해 임무를 치른 경우는 찾아보기 매우 힘들다. 그가 이렇게 현역에 복귀한 이유가 자신의 헌신을 증명하려는 노림수였건, 단순한 애국심이나 불타오르는 열정이었건 간에 대단히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었음은 틀림없다. 대공포에 맞은 같은 달에는 공군 총사령관인 [[헤르만 괴링]]으로부터 유럽 전역에 걸친 "유대인 문제 최종해결책"을 건의받았고 이를 근거로 해서 1942년 1월 [[반제 회의]]에서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보내 학살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이 때부터 폴란드 유대인 학살계획은 (아마도) 하이드리히의 이름을 따서 "라인하르트 작전"이라고 불렸다. 여기서 작전 이름을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에서 따오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다른 유력한 후보는 재무장관이던 프리츠 라인하르트(Fritz Reinhardt)로 루돌프 회스가 재판 당시 이 계획의 이름을 딴 대상으로 증언했던 바 있다. 프리츠 라인하르트는 절멸수용소에서 희생당한 유대인들의 재산을 처리하는 총책임자였다. 한편, 폴란드 이동에서 이루어진 아인자츠그루펜의 학살, 그리고 독일 직할령에 세워진 헤움노 절멸수용소는 라인하르트 작전에 따른 것이 아니다. 라인하르트 계획으로 세워진 절멸수용소는 트레블링카, 베우제츠, 소비보르의 3개로 오로지 폴란드 유대인 절멸을 위해 세워졌다. 아우슈비츠는 설립 자체는 라인하르트 작전에 의한 것이 아니었지만 라인하르트 작전이 발효된 후 절멸수용소로 개조되었다. [[파일:attachment/reinhard06.jpg]] 하이드리히는 냉혹냉철한 성격에 무자비한 일처리 방식, 타고난 근면성과 예리한 정치수완에 [[해군]]에 있을 때부터 익힌 정보능력([[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에 능해 해군시절 정보부에 적을 두기도 했다) 등 출중한 능력으로 히틀러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권력서열로는 뒤쳐졌으나 정보/[[경찰]]권을 장악한만큼 나치 당내에서조차 히틀러 유고시 권력을 장악할 제1순위라는 예측이 떠돌 정도였다. 이쯤 되니 하이드리히를 처음 발탁한 힘러 또한 하이드리히를 경계하여 죽을 때까지 냉각관계를 유지했다. 하이드리히도 힘러를 무능하다고 경멸하여 힘러의 의견에 반대되는 보고서를 제출해 물먹인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고 이에 힘러는 쪼잔하게 하이드리히의 째진 눈을 트집잡아 "몽골인"이라 욕하곤 했다. 그런데 힘러야말로 전형적인 아시아인 스테레오 타입 외모를 가진 인물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힘러를 포함, 괴벨스, 괴링 등 외모를 가장 중요한 인종적 기준 중 하나로 삼던 나치 고위 인사들은 거의가 추물투성이여서 원래도 준수한 외모였던 하이드리히는 이들 사이에 가져다놓으면 그야말로 나치가 꿈꾸던 아리아인의 이상향 그 자체였다. 다만 괴벨스나 힘러는 원래 못 생겼어도 괴링은 살이 찌기 전 사진을 보면 나름 쾌남형 외모를 갖고 있긴 했다. 또한 하이드리히가 키가 작았다는 말이 있었는데,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하이드리히의 키는 무려 '''191cm'''로 오히려 매우 큰 편이었으며, 밑의 사진에서도 하이드리히의 키가 제일 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파일:attachment/reinhard07.jpg]] (앞 줄의 세 명 중 가운데가 하이드리히)[* 맨 오른쪽은 제외.][* 하이드리히 옆에는 [[하인리히 뮐러]], [[하인리히 펠리스]]가 있다. 맨 왼쪽에서 두번째가 [[발터 셸렌베르크]]이다.] 1936년에 [[게슈타포]]는 사법경찰(Kriminalpolizei)까지 흡수하여 공안경찰(SiPo)로 거대해졌다. 하이드리히는 [[상급대장]] 직위의 게슈타포의 초대 국장이 되었으며 1941년 37살의 나이에 노이라트의 뒤를 이은 [[체코]] 총독이 된다. 당시 나치 독일의 명칭은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전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에밀 하하]]를 수반으로 하는 괴뢰 정부가 있기는 했으나 사실상 나치 독일의 점령지였다. 체코 총독이 된 하이드리히는 잔인한 철권통치를 펼쳐 저항조직을 분쇄하고 체코인들의 저항을 찍어눌렀다. 이때 얻은 별명이 '프라하의 도살자' 혹은 '교수형 집행자 하이드리히'다. 헌데 강경책만 쓴 것이 아니라 체코인 노동자들에게 배급량을 대폭 늘려주거나, 체코인 대표단을 정기적으로 접견하거나, 휴양시설을 개방하는 등의 온건책도 병행하여 체코 지역의 민심이 '안정'되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야말로 '채찍과 당근'의 교과서적 사례. 자신의 능력을 전면에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그의 성격답게 매일 출퇴근에 호위차량, [[경호원]] 심지어 [[전속부관]]조차 없이 전속 [[운전병|운전]][[부사관]] 한명만 대동하고 [[메르세데스-벤츠]] 320B [[컨버터블]] 차량을 뚜껑까지 열어놓고 타고 다니는 등 자신을 과시하는 행동을 많이 했다고 한다. 결국 그 때문에 아래와 같이 암살에 노출되어 최후를 맞이했다. 암살 후에 그의 이런 자만심 넘치는 행보에 대해 다른 나치 고관들은 "바보같다"고 평했다고 한다. 히틀러도 외출도 자주 나가던 개전 전과 달리 개전 후 숱한 암살시도의 영향으로 총통 벙커 같은 곳에 쳐박혀서 나올 생각을 못했던 걸 생각해보면 나름 정확한 평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